요한복음 강해 7. 더 큰 일을 보리라 (요한복음 1:43-51)

요한복음 강해 7. 더 큰 일을 보리라 (요한복음 1:43-51)

이 내용은 송태근 목사님의 요한복음 강해
7번째 더 큰 일을 보리라라는 제목으로
전하신 말씀을 글로 정리한 것입니다.
영상 설교는 맨 하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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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이튿날’

요한복음은 계속해서 “이튿날”이라는 표현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보여줍니다.
이 표현은 단순한 날짜 표시가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이 점진적으로 펼쳐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장치입니다.

오늘 본문도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요 1:43)

예수님은 갈릴리로 향하십니다.
갈릴리는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동안 가장 중요한 사역의 중심지였습니다.

그 길에서 예수님은 빌립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를 제자로 부르십니다.



만나다

우리말 성경을 읽으면
예수님이 갈릴리로 가는 길에 우연히 빌립을 만난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문에 사용된 “만나다”라는 단어는
헬라어 유리스코(εὑρίσκω)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단순한 만남이 아니라
찾고 또 찾은 끝에 만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즉, 이 만남은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사소한 만남조차 우연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일상 속 만남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만남 같지만
하나님의 시선에서는 찾고 찾아 이루어진 만남입니다.



베세다

본문은 빌립의 출신지를 설명합니다.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사람 베세다 출신이라” (요 1:44)

베세다라는 지명의 뜻은
“어부의 집”입니다.

이들은 같은 어촌 마을에서 자란 청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부르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

여기서 “낚는다”는 말은
어둠 속에서 신음하는 영혼들을
끌어올린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나다나엘

이제 이야기는 새로운 인물로 넘어갑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요 1:45)

빌립은 자신이 만난 예수님을
가장 먼저 나다나엘에게 소개합니다.

그는 두 가지 사실을 말합니다.

  1. 모세와 선지자들이 기록한 그 사람이다
  2. 나사렛 사람 예수다

겉으로 보면 정확한 정보 전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빌립도 예수님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단지 자신이 경험한 사실을 전했을 뿐입니다.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나다나엘의 반응은 소극적인 반론이었습니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요 1:46)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게 위대한 메시아가
어떻게 그런 작은 동네에서 나올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깊은 역설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언제나
작고 초라한 곳에서 시작됩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려면
마음이 낮아지고 가난해져야 합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와서 보라

나다나엘의 반론에 대해
빌립은 복잡한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 한 마디만 합니다.

“와서 보라.”

이 말은 빌립이 처음 한 말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이 먼저 사용하신 표현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요 1:39)

예수님도 설득이나 논리보다
직접 경험하도록 초대하셨습니다.

신앙은 이해하고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알아가는 길입니다.



그 속에 간사함이 없도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요 1:47)

이 말은 단순히 나다나엘의 성품을 칭찬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선포하시는 선언입니다.

시편 32편은 이렇게 말합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2:1)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2:2)

여기서 간사함이 없다는 말은
죄가 제거되고 가려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 죄를 제거하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십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나다나엘은 놀라서 묻습니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요 1:48)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요 1:48)

무화과나무 아래라는 표현은
단순히 나무 그늘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구약에서 이 표현은
평안과 안식의 상징입니다.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더라” (왕상 4:25)

또 예수님 당시에는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있다는 말이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태도를 의미했습니다.

즉, 나다나엘은
참된 평안과 메시아를 기다리며
말씀을 묵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요 1:49)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요 1:50)

메시아를 만난 것보다 더 큰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사닥다리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요 1:51)

이 장면은 창세기 28장의
야곱의 꿈을 가리킵니다.


야곱은 형을 속이고 도망가던 길에
돌을 베고 노숙을 합니다.

그 밤에 그는 꿈을 꾸게 됩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창 28:12)

이 사닥다리는
사람이 올라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내려오는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창 28:15)


 

더 큰 일

예수님이 말씀하신 “더 큰 일”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내려와
우리 인생 속에 임하는 것.

예수님 자신이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닥다리가 되신다는 선언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눈물 속에 함께하시고
우리의 고단한 여정 속에 동행하시며
끝까지 우리 인생의 추적자가 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참 이스라엘로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기까지
20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간사함을 하나씩 뽑아내며
그를 참 이스라엘로 만들어 가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도
죄와 간사함을 제거하시며
참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끝까지 함께하시는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를 만나고 끝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 인생의 모든 순간에 함께하시며
끝까지 동행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더 큰 일”의 의미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인생 위에 임하는 일입니다.

이 약속의 말씀 속에서
새 힘과 새 소망을 얻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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