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06)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네 가지 질문
오늘 본문은 “이튿날”이라는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이 표현은 단순한 시간 표시가 아니라, 요한복음 전체의 중요한 구조를 드러내는 단서입니다.
요한은 이상하게도 날짜를 반복적으로 명시합니다.
그런데 그 패턴이 매우 일정합니다.
지난 본문에서는 유대인들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세례 요한에게 보내 질문을 던지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그들은 네 가지 형태의 질문을 던집니다.
“너는 누구냐”
“엘리야냐”
“그 선지자냐”
그러나 세례 요한은 분명한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기보다 “나는 아니다”라는 방식으로 답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그 사건이 있은 다음 날을 말합니다.
이튿날
요한복음 1장에는 ‘이튿날’이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29절에서 한 번,
35절에서 또 한 번,
43절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 흐름은 2장 1절에서 절정을 맞습니다.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요 2:1)
이 날짜들을 모두 합하면 총 6일이 됩니다.
이 6일은 우연이 아닙니다. 바로 창조의 6일을 떠올리게 하는 구조입니다.
요한복음 1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 1:1)
이 표현은 창세기 1장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1)
창세기의 창조는 6일 동안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가 들어오면서 그 창조 질서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세상은 혼란과 부패, 죽음 아래 놓이게 되었고
인류는 길을 잃고 죄와 절망 속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은 바로 그 무너진 세상을 다시 창조하시기 위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다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즉, 요한복음 1장의 ‘이튿날’이라는 반복은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신학적 장치입니다.
어린 양
이제 본문의 핵심 구절을 살펴봅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29)
이보다 더 명확한 예수님의 정체성 선언은 없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선포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어린 양은 단순한 동물이 아닙니다.
이 표현은 유월절 사건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00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속에서 마지막 심판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면
죽음의 심판이 그 집을 넘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이 바로 유월절의 기원이 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어린 양은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대속의 제물로 드려지는 어린 양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대속의 어린 양으로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지고 간다
본문에는 또 중요한 표현이 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이라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지고 간다’는 말은 헬라어로 아이로(αἴρω)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단순히 짊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제거하고 치워버린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의 슬픔을 대신 짊어지는 분이 아니라
죄 자체를 제거하러 오신 분입니다.
없이 하소서
이 단어는 요한복음 후반부에서도 등장합니다.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요 19:14)
“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요 19:15)
여기서 “없이 하소서”라는 표현 역시
같은 단어 아이로가 사용됩니다.
예수님은 죄를 제거하시기 위해 오셨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그 예수님을 제거하라고 외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영적 무지와 역사적 아이러니입니다.
먼저 계신 분
세례 요한은 또 이렇게 증언합니다.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요 1:30)
생물학적으로 보면 이 말은 모순처럼 보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말합니다.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라고.
이 말은 단순한 시간 순서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선재성, 즉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어린 양이시면서 동시에
영원부터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세례 요한은 두 번이나 같은 표현을 합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요 1: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요 1:33)
이 말은 예수님이라는 사람을 몰랐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는 친척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그가 메시아인지 몰랐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결국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증언하게 됩니다.
세례 요한이 변화된 이유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증언하게 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성령의 역사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 12:3)
사람이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결단이나 지혜 때문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순간
이미 성령이 그 안에 역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 아버지의 계시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 16:17)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을 때
예수님은 그것이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을 메시아로 깨닫는 것은
위로부터 임하는 계시와 성령의 역사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
세례 요한의 증언도 바로 그 원리 안에 있습니다.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요 1:33-34)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합니다.
같은 말씀을 들어도 어떤 사람은 회개하고,
어떤 사람은 냉담하게 반응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설득력이나 논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전도와 선교는
우리의 지혜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순종으로 경험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믿는 사람은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또 다른 ‘이튿날’
요한복음은 계속해서 날짜를 강조하며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오늘 본문도 또 하나의 “이튿날”로 시작합니다.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35-36)
이 장면은 시간 흐름상 셋째 날에 해당합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일정한 날짜의 흐름 속에서
예수님의 첫 사역의 한 주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
여기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표현이 다시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 선언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29절에서는 이 표현이 전체 이스라엘을 향한 공적인 선언이었습니다.
그러나 35절에서는 자기 제자들에게 들려주는 개인적인 선언입니다.
대상은 달라졌지만 메시지는 동일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본질입니다.
복음은 대상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다.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
한국 사람과 미국 사람,
아시아 사람이든 아프리카 사람이든 상관없습니다.
복음은 모든 인류를 하나의 범주로 봅니다.
그 범주는 바로 죄인입니다.
참된 제자훈련의 목적
이 선언을 들은 두 제자의 반응은 매우 중요합니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요 1:37)
이 두 제자는 방금 전까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단순한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쿰란 공동체에서 함께 생활하며
금욕적인 삶을 살며
메시아를 기다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의 한 마디 선언을 듣고
그들은 방향을 바꿉니다.
요한을 떠나 예수를 따르기 시작합니다.
이 장면은 참된 제자훈련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제자훈련은 목사의 제자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기능을 위한 사람을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참된 제자훈련은
예수를 따르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프로그램과 훈련, 예배와 사역의 마지막 목적은
오직 하나입니다.
예수를 따르게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두 제자가 예수를 따르자 예수님이 먼저 말을 건네십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요 1:38)
이 질문은 조금 차갑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한 제자들에게
따뜻한 격려의 말이 먼저 나올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질문은 본질을 향합니다.
“나를 따르는 목적이 무엇이냐”는 질문입니다.
어디 계십니까
그런데 제자들의 대답은 더 의아하게 들립니다.
“무엇을 구하느냐”는 질문에
“어디 계십니까”라고 대답합니다.
겉으로 보면 대화가 어긋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말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라는 말은
단순히 주소를 묻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의 진짜 뜻은 이렇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머물며 더 깊이 배우고 싶습니다.”
이 제자들은 충동적으로 따라간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매우 신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
예수님을 따르는 과정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버리고 즉시 따라갑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돌아옵니다.
어떤 사람은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오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언제부터 믿게 되었는지도 모르게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간증을 절대적인 원리처럼 만들면 위험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와서 보라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요 1:39)
여기서 요한은 매우 구체적인 시간을 기록합니다.
열 시쯤 되었다는 말은
유대식 시간으로는 오후 4시경을 의미합니다.
즉, 제자들은 그날 거의 하루 종일
예수님과 함께 머물렀다는 뜻입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시간 기록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의 핵심 주제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거하심
요한복음 1장 1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 1:14)
요한복음의 핵심 주제는 바로 거하심입니다.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머무시는 것,
그것이 복음의 중심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에게 일을 시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이용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주님이 가장 먼저 원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나는 너와 함께 있고 싶다.”
주님과 함께 거하는 삶
오늘날 교회 분위기는 사명과 비전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사명과 비전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우선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과 함께 거하는 삶입니다.
선교와 전도,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며
그분과 교제하는 감격 속에서 흘러나오는 열매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머무는 이 경이로움,
이보다 더 큰 감격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높은 하늘의 영광을 내려놓고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사실을 놓치면
겉으로는 열심히 사역하는 것처럼 보여도
곧 피로와 탈진이 찾아오게 됩니다.
함께 거하는 삶
야곱이 라헬을 얻기 위해 7년을 섬겼을 때
그 시간은 그에게 하루처럼 느껴졌습니다.
주님과 함께 거하는 삶도 그렇습니다.
주님 안에 머물 때
섬김과 감사와 열매는 억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 됩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거할 때
그 삶은 생명으로 가득 찬 삶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먼저 사명을 맡기지 않으십니다.
먼저 함께 머물자고 부르십니다.
주님과 함께 거하는 시간이
삶의 중심이 될 때
사역은 부담이 아니라 기쁨이 됩니다.
일상의 분주함 속에서도
주님과 함께 머무는 시간을 놓치지 않는 삶,
그 은혜를 누리는 존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