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4. 신방(新房)을 차리다 (요한복음 1:14-18)

요한복음 강해 4. 신방(新房)을 차리다 (요한복음 1:14-18)

이 내용은 송태근 목사님의 요한복음 강해
4번째 신방을 차리다라는 제목으로 
전하신 말씀을 글로 정리한 것입니다.
영상설교는 맨 하단에 있습니다.

요한복음 모두보기


말씀이 육신이 되신 사건

요한복음 1장 1절부터 18절까지는 요한복음 전체의 문을 여는 장엄한 서론이에요.
그 가운데에서도 14절은 신학적으로 가장 깊고도 경이로운 정점이라고 할 수 있어요.
특히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라는 표현은 인간의 언어로는 온전히 담아내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운 의미를 담고 있어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4)

여기서 ‘말씀’은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신 ‘로고스’를 의미해요.
창조 이전부터 존재하셨고,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곧 하나님이셨던 존재가 바로 그 ‘말씀’이에요.
그런데 그 로고스가 ‘육신’이 되었다는 표현은 단순히 인간의 몸을 입었다는 의미를 넘어선 깊은 신학적 선언이에요.

성경에서 ‘육신’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사르크스(sarx)’로 표현되는데, 단순히 물질적인 몸만 의미하지 않아요. 이 단어는 부패와 죽음, 유한성과 연약함까지 포함하는 인간 존재 전체를 나타내는 말이에요.
창세기에서는 인간이 타락하면서 ‘사람이 육체가 되었다’라고 표현되는데, 이는 인간이 죄와 죽음 아래 놓이게 되었음을 보여줘요.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이신 아들이 바로 그 연약한 인간의 상태로 들어오셨어요.
여기서 중요한 점은 예수님의 신성이 사라지거나 중단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이셨지만 동시에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어요.
즉, 신성과 인성을 함께 가지신 채 이 땅에 들어오신 사건이 바로 성육신이에요.
그 목적은 단 하나, 인간을 대속하기 위함이었어요.

예수님께서 공생애 시작 전 광야에서 사십 주야 금식하신 후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던 사건도 이 성육신의 진정성을 보여줘요.
사탄이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유혹했던 목적은 단순히 배고픔을 이용한 시험이 아니었어요.
만약 예수님이 신적 능력을 사용해 시험을 피하셨다면,
온전한 인간으로서 십자가 대속을 완성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은 철저히 인간으로 순종하시며 구원의 길을 완성하셨어요.



스케노오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또 하나 중요한 단어가 등장해요. 바로 ‘거하시매’라는 표현이에요.
이 단어는 헬라어 ‘스케노오(skēnoō)’인데, 직역하면 ‘장막을 치다’라는 의미예요.

이 표현은 출애굽기의 성막 사건과 깊이 연결돼 있어요.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출애굽기 40:34-35)

광야에서 성막 위를 덮은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어요.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실체를 직접 보지 못했지만, 그 임재의 상징인 구름을 통해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경험했어요.
구름이 움직이면 백성도 이동했고, 구름이 머무르면 그 자리에 머물렀어요. 이 과정은 철저한 순종 훈련이었어요.

이 성막은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였어요.
그리고 바로 이 성막의 개념이 요한복음에서 성육신 사건으로 완성돼요.
예수님이 인간 가운데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거하시기 위해 장막을 치셨다는 의미예요.



출애굽기 속 구원의 그림

출애굽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어요.
1장부터 18장까지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를 설명해요.
이 부분은 애굽의 노예 상태,
죽음과 고통의 삶에서 해방되는 과정을 보여줘요.

19장부터 40장까지는 ‘무엇을 향한 자유’를 설명해요.
이 부분은 성막을 세우는 과정이에요.
성막 제작 방법이 세밀하게 기록된 이유는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를 준비하는 과정이기 때문이에요.

성막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과 백성이 만나는 언약적 공간이었어요.
동시에 성막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을 예표하는 상징이었어요.

교회를 의미하는 헬라어 ‘에클레시아’도
‘불러냄을 받은 자들’이라는 뜻이에요.
하나님은 인간을 죄와 사망에서 불러내어
하나님과 함께 거하도록 초대하셨어요.
결국 성육신은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살기 위해
오신 사건이라고 할 수 있어요.



구원의 의미

요한복음이 강조하는 구원의 핵심은 단순히 죄 사함이라는 결과가 아니에요.
구원은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관계적 삶이에요.

요한계시록에서도 이 관계의 본질을 이렇게 표현해요.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요한계시록 3:20)

이 말씀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만 주어진 초청이 아니라 이미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주어진 말씀이에요.
하나님은 단순히 필요할 때 도움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삶을 나누는 분으로 다가오세요.
성육신은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살기 위해 오신 사랑의 선언이에요.



독생자의 영광

요한복음에서 등장하는 ‘독생자’라는 표현은 외아들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유일무이한 존재’를 의미해요.

“우리가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한복음 1:16)

여기서 ‘은혜 위에 은혜’라는 표현은 단순한 은혜의 축적이 아니에요.
헬라어 전치사 ‘안티(anti)’는 대체와 대비의 의미를 포함해요.
즉, 이전의 은혜가 새로운 은혜로 완성되고 대체되었다는 뜻이에요.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요한복음 1:17)

율법 역시 은혜였어요.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표지판이었어요.
하지만 예수님이 오심으로 율법이 완성되고 새로운 은혜가 시작되었어요.
모세는 율법을 전달받은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 자체로 오셨어요.



아버지 품에서

요한복음 마지막 절은 성육신의 궁극적인 목적을 보여줘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한복음 1:18)

‘품’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위치가 아니라 친밀함과 동등함을 의미해요.
아버지 품에 계셨던 예수님이 인간 가운데 오신 이유는 인간을 다시 아버지 품으로 인도하기 위함이에요.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탕자의 비유에서도 이 관계 회복의 본질을 볼 수 있어요.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누가복음 15:20)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완벽함이 아니라 관계의 회복이에요. 성경이 말하는 ‘온전함’은 결점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상태를 의미해요.



오직 그리스도

요한복음 1장 18절에서 ‘나타내셨다’라는 표현은 하나님을 해석하고 설명했다는 의미를 포함해요.
하나님을 온전히 보여줄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에요.
하나님을 이해하는 가장 정확한 길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에요.

성육신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다가오신 가장 완전한 계시예요.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는 것을 넘어 함께 살기를 원하셨어요.
요한복음은 바로 이 놀라운 관계적 구원의 이야기를 선포하는 책이에요.


댓글 쓰기

다음 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