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2. 태초에 빛이 (요한복음 1:1-5)

요한복음 강해 2. '태초에 빛이'

이 내용은 송태근 목사님의 요한복음 강해
2번째, 태초에 빛이 라는 제목으로 전하신
말씀을 글로 정리한 것입니다.
영상설교는 맨 하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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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

요한복음 강해는 아주 익숙한 단어로 시작됩니다. 바로 “태초”라는 말이에요. 이 표현은 이미 우리에게 낯설지 않습니다. 창세기 1장 1절도 같은 말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한 문장 안에는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 통치와 주권이 모두 응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번역은 동일하게 “태초”라고 되어 있지만,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와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는 그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

창세기에서 말하는 태초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물리적인 시간의 시작, 곧 우주 만물이 창조된 시점을 가리킵니다. 시간의 흐름이 시작된 그 첫 지점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사용된 “태초”(ἀρχή, 아르케)는 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차원의 태초입니다. 이것은 시간 안의 한 시점이 아니라, 시간 자체가 존재하기 이전, 어떤 존재의 기원을 설명하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묻게 됩니다.
과연 어느 태초가 더 근본적인 태초일까요?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입니다.
이것은 시간의 길이를 말하는 문제가 아니라, 차원이 다른 태초입니다.



말씀이 계시니라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여기서 “말씀”은 헬라어로 로고스(Logos) 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단어를 헬라 철학적 개념 정도로만 이해하지만, 실제로 이 로고스라는 개념의 뿌리는 구약적 배경에 깊이 닿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까?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아담의 범죄로 타락하여 사망 아래 놓였을 때, 하나님은 무엇으로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까?
언약과 말씀으로 구원을 계획하시고 이루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구약 전체에서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말씀으로 재창조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이 담고 있는 로고스의 핵심 개념입니다.



구약 속 로고스

이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중요한 증거가 유대 문헌들 속에 남아 있습니다. 유대 중간기 문학과 회당 전통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있는데, 바로 ‘멤나’ 입니다. 이 단어는 곧 로고스, 즉 말씀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신의 창조 행위나 구속의 행위를 말할 때 이 멤나라는 개념을 사용했습니다. 다시 말해, 로고스는 결코 헬라 철학에서만 차용된 개념이 아니라, 이미 구약 신앙 안에서 살아 움직이던 개념이었습니다.

요한이 로고스라는 표현을 채택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구약에서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그 하나님이,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되어 오셨기 때문입니다.



헬라 세계의 로고스

물론 헬라적 배경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헬라 시대 사람들에게 로고스는 매우 익숙한 개념이었습니다.

그들은 로고스를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인간의 합리적인 사고, 그리고 그 사고가 언어로 표현될 때 사용되는 수단, 그것이 로고스라는 것입니다.

이 개념은 점점 확대되어,
“우리가 우주의 이치를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안에 로고스의 씨앗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생각으로 발전했습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개념이 바로 그노시스(지식) 입니다.

이 사상은 결국 “구원은 지식을 통해 얻는다”는 위험한 결론으로 나아가게 되었고, 이것이 영지주의의 뿌리가 됩니다. 오늘날에도 “믿음이란 깨달음이다”라는 형태로 이 사상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요한은 바로 이 지점에서 로고스라는 형식은 사용하되, 그 내용은 철저히 구약의 말씀 개념으로 채워 넣습니다.



계시니라

요한복음 1장 1절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창조되었다.”

대신 이렇게 말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여기서 사용된 동사는 미완료형입니다. 이 말은 어떤 미성숙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하여 언제나 존재해 오셨다는 뜻입니다.

즉 요한복음의 태초는 시간의 출발점이 아니라, 시간 이전부터 계신 존재를 말합니다.

그분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프로스(πρός)

요한은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여기서 “함께”라는 말은 일반적인 전치사가 아닙니다. 요한은 헬라어 전치사 프로스(πρός) 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나란히 있다는 뜻이 아니라, 마주 보고 향하고 있는 관계를 뜻합니다.

이 표현이 담고 있는 의미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영광과 본질과 지위에 있어서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둘째, 성자 예수님은 모든 존재와 사역의 방향이 아버지를 향해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삼위일체의 중요한 윤곽이 드러납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은 더 나아가 이렇게 선언합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은 앞에 등장한 성부 하나님과 구분되는 다른 신이 아닙니다. 뒤에 나오는 하나님은 관사가 없는 형태로, 삼위 하나님 전체의 본질을 가리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보다 낮은 분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 중 한 분이십니다.
이 본문만큼 삼위일체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말씀도 드뭅니다.



창조에 함께하신 성자 하나님

요한복음 1장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여기서 “그”는 성자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천지창조는 성부 하나님 혼자 하신 일이 아니라, 성자 하나님도 함께 참여하신 창조 사역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단순한 구원자가 아니라, 창조주이시며 통치자이십니다.



무너진 집과 새 창조의 시작

아담의 죄로 인해 세상은 무너졌습니다. 집으로 비유하자면,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상태입니다. 리모델링으로 해결될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헐고 다시 짓는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이 “거하셨다”는 말은 텐트를 치셨다는 뜻입니다. 새 집을 짓기 위한 시작이었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옛 아담의 족보를 끝내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새 창조를 시작하셨습니다.



빛과 어둠

요한복음 1장 4–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여기서 “깨닫지 못하더라”는 말은 단순한 이해의 실패가 아닙니다. 원문에 더 가까운 뜻은 “이기지 못하더라” 입니다.

어둠은 결코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어둠을 몰아내는 방법은 오직 하나, 빛이 비추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선교이며, 순종이며, 우리의 삶의 방식입니다.


폐허가 된 인생의 집에 생명의 빛 되신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셔서,
어둠을 몰아내고 새 창조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소망합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이기지 못하더라.”

이 말씀이 우리의 현재이자, 미래의 소망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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