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3강, 베드로와 바울 (행 3:1-2)

사도행전 3강, 베드로와 바울 (행 3:1-2)

이 내용은 이지웅목사님의 사도행전 말씀
3강 베드로와 바울이란 제목으로
전하신 말씀을 글로 정리한 것입니다.
영상설교는 맨 하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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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가 성경 전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를 관통하는 아주 중요한 주제라는 사실을 살펴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 동안 사셨을 뿐 아니라, 마지막으로 가르치신 핵심 또한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나라’라는 개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나라의 개념과, 예수님 당시, 사도 바울과 베드로가 살던 2,000년 전의 나라 개념은 완전히 다릅니다.

오늘날의 나라 개념은 국경입니다. 위도와 경도를 기준으로 정확하게 선을 긋고, 이 선 안은 이 나라, 저 선 밖은 저 나라라고 말합니다. 유럽에서 살아보면 이 개념이 아주 분명하게 느껴집니다. 스위스 제네바 공항에 가면 바닥에 선이 그어져 있고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스위스, 여기부터는 프랑스.”

그러나 2,000년 전에는 위도와 경도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시대 사람들은 나라를 어떻게 구분했을까요? 그 기준은 땅이 아니라 사람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누구의 통치를 받느냐였습니다.

“나는 이 왕의 통치를 받습니다. 이분이 나의 왕입니다.”

이 고백을 하는 사람이 있는 가장 끝 지점이 바로 그 나라의 경계였습니다. 아무리 그 나라 땅 안에 있어도
“이 왕은 내 왕이 아니다. 나는 이 법을 따르지 않겠다.”
라고 말하는 순간, 그는 그 나라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나라의 본질은 영토가 아니라 통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본질

이 관점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핵심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왕이십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순복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삽니다.”

이 고백을 하는 사람이 있는 곳, 그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교회를 다니고, 헌금을 하고, 주일을 지켜도 삶의 기준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면, 그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만을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기도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을 이용하려 합니다.

“하나님, 이렇게 하십시오.”
“하나님, 저렇게 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을 굴복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행위가 아닙니다. 기도의 핵심은 내가 하나님 앞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죄로 가득합니다.”
“나를 주께 순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말씀을 따라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때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반드시 통치와 함께 옵니다. 통치 없는 능력은 없습니다.

1907년 평양 대부흥도 같은 원리였습니다. 그 부흥은 거대한 집회에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한 청년의 기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수년 동안 단 한 가지만 기도했습니다.

“주여, 나로 주께 순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한 사람에게 성령이 충만히 임했고, 한 교회가 변했고, 한 도시가 변했고, 결국 한 민족과 세계가 영향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능력은 사람이 하나님을 이용할 때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다스릴 때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단지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이 곧 하나님 나라입니다.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갔다는 것은 곧 하나님 나라에 나아간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것은 하나님 나라를 영접한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길 원하셨습니다. 말씀도 주시고, 성전도 주시고, 제사도 주셨지만 이스라엘은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사탄의 세 가지 시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로서 실패했던 대표적인 세 영역이었지만, 예수님은 그 모든 시험을 완벽하게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로서의 삶을 완벽하게 사셨고, 십자가와 부활로 모든 것을 완성하셨습니다.



교회,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

예수님은 승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누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역할을 감당합니까? 답은 분명합니다. 성령을 받은 교회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성령이 예수님께 임했던 것처럼, 사도행전에서는 성령이 120명의 사람들에게 임합니다. 그들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교회가 확장된다는 것은 곧 하나님 나라가 확장된다는 의미입니다. 어느 지역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은, 그곳에 하나님의 통치가 임했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친목단체가 아닙니다. 복지기관도, 문화센터도 아닙니다. 교회만이 감당할 수 있는 유일한 사명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펼치는 것입니다.

교회의 능력은 숫자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돈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교회의 능력은 거룩함에서 나옵니다. 거룩함을 잃는 순간, 교회는 힘을 잃습니다. 그리고 그 거룩함 위에 성령의 능력이 임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한 사람에게 임하다

오순절 이후, 교회가 시작된 뒤 가장 먼저 기록된 사건이 사도행전 3장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정해진 기도 시간에 성전에 올라가다가, 날 때부터 걷지 못한 한 사람을 만납니다. 이 사람은 약 사십여 세였습니다.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사도행전 4:22)

이 사람은 늘 성전 미문에서 멈춰 있었습니다. 성전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의 목적은 예배가 아니라 구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베드로와 요한이 그를 주목하여 봅니다.

“우리를 보라.”

그리고 말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이 장면은 단순한 기적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가 한 사람에게 임한 사건입니다. 절망 그 자체였던 한 사람의 삶에 하나님 나라가 다가온 것입니다.

그 결과는 분명했습니다.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하나님 나라가 임하자, 이 사람의 자리는 미문에서 성전 안으로 바뀌었습니다. 회복이 일어났고, 찬양이 터져 나왔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오늘도 하나님은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베드로와 요한의 역할을 감당하길 원하십니다. 능력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말재주나 신분,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은 우리 손에 들려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을 소유한 사람이라면,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가가십시오. 하나님 나라는 오늘도 그렇게 사람을 통해 임합니다.



사람의 시선을 예수님께로

기적이 일어난 직후,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베드로에게로 향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두 번째로 이렇게 말합니다.

“왜 우리를 주목합니까?”

사람들은 그 놀라운 일을 행한 베드로를 바라봤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주변으로 몰려들어 그들을 주목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설교를 시작합니다. 이 설교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이 설교가 맡고 있는 역할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사람들의 시선을 자기 자신에게서 예수님께로 돌리는 설교였습니다.
“당신이 메시아 아닙니까? 당신이 능력자 아닙니까?”
라고 집중하는 사람들의 눈빛을, 단호하게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려버립니다.

이 장면은 정말 멋있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건 두려운 일입니다. 어느 목사도, 어느 사역자도, 어느 지도자도 사람들의 집중을 자기에게로 끌어오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서면 안 됩니다.

만약 이 순간 베드로가 침묵했다면, 혹은 은근히 그 시선을 즐겼다면, 그는 돈과 명예와 인기를 얻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곧 무너짐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나를 보지 마라. 예수를 보라.”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이 사람들로 하여금 나 자신을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게 만드는 삶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아니라 예수님

혹시 우리 가운데 사회적으로 성공하신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성공이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나에게로 모으게 합니다. 영향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위와 재정, 명성과 능력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옵니다.

그럴 때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이 성공을 가지고, 이 영향력을 가지고,
베드로처럼 사람들의 시선을 예수님께 돌리고 있는가?

나에게 집중되는 그 눈빛을,
“내가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라고 돌려줄 수 있다면, 그 삶은 정말 아름다운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의 목적이 이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만 높임 받는 삶.
나는 낮아지고, 예수님만 드러나는 삶.

오늘 이 밤에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 내가 이 땅에 사는 동안
내 모든 삶을 통해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 드러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 삶이 하나님 나라가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하나님 나라를 맛보게 하는 통로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삶, 정말 멋있지 않습니까?
물론 하루 세 끼 먹고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말고, 우리의 기도가 여기까지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베드로의 설교를 내용도 좋아하지만, 그 설교의 역할을 너무도 사랑합니다.



스데반과 바울

하나님의 나라는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날 때부터 걷지 못한 한 사람에게만 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또 한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바로 사도행전 9장에 등장하는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원래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산헤드린 공회로부터 권한을 받아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때리고, 심지어 죽일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고, 감옥에 가두었고, 죽였습니다.

바울 스스로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포악자였으나…”

맞는 말입니다. 그는 포악자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가 만나 주십니다. 한순간에 인생이 바뀝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스데반의 순교와 바울의 회심을 잇는 하나의 기도

이 장면을 이해하려면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그리고 베드로와 바울 당시 이스라엘은 독립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로마의 속국이었습니다. 그래서 재판권은 로마에 있었습니다.

다만 로마는 유대인들에게 한 가지 예외를 허락했습니다.
유대교 내부의 종교 문제, 즉 신성 모독에 관한 문제만큼은 산헤드린이 처리할 수 있도록 허락한 것입니다. 단 조건이 있었습니다. 사형을 집행할 경우 반드시 산헤드린 70명 중 한 명이 입회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돌로 쳐 죽이는 장면에는 항상 책임자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증인들이 옷을 벗어 재판관의 발 앞에 내려놓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도행전 7장을 보겠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장면입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여기서 아주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십니다.

성경 전체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만 서 계십니다. 기립은 존경의 표현입니다. 스데반의 첫 순교를 향한 예수님의 존중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입니다.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이제 분명해집니다. 스데반 순교의 최고 책임자는 사울, 곧 바울이었습니다.
우리가 존경하는 사도 바울이, 사실은 스데반을 죽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스데반이 마지막으로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기도를 누가 들었을까요?
그 소란 속에서 이 기도를 정확히 들을 수 있었던 사람은 바로 사울이었을 것입니다.



스데반의 기도 위에 태어난 사도 바울

스데반의 순교 이후 이야기는 곧바로 사도행전 9장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바울을 만나 주십니다. 바울은 자신의 회심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나 같은 쓰레기 같은 사람을 예수님이 왜 만나 주셨을까?”
“왜 나 같은 사람을 살려 주셨을까?”

그는 이것을 스데반의 기도의 결과로 받아들였습니다.

스데반이 죽어가며 드렸던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그 기도가 씨앗이 되어 사도 바울이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13서신 곳곳에는 순교와 용서, 은혜에 대한 깊은 울림이 가득합니다.
스데반이 없었다면, 바울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스데반이 있다

사실 사도 바울에게만 스데반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스데반이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는 누군가의 기도 때문입니다.
권사님의 눈물, 부모님의 간구, 목회자의 중보,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의 사랑.
누군가가 스데반이 되어 주었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여기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누군가의 스데반이 되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사람을 품는 일은 고슴도치를 끌어안는 것과 같습니다. 피 흘리지 않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세상이 포기했어도, 우리는 포기하지 맙시다.

사도 바울이 변화되었다면, 누구든지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할 일은 단 하나입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더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십시오.”

이 교회가 은혜와 긍휼과 용납으로 가득한 공동체가 된다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저 교회는 사람을 품는다.”
“저 사람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이름이 이 지역 가운데 높임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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