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6.그럼에도 불구하고 (계 10:9)

요한계시록 6장부터 16장
요한계시록 가운데서도 가장 복잡하고 난해한 부분은 단연
6장부터 16장까지라고 할 수 있어요. 이 구간에는 네 개의 거대한
사이클이 반복적으로 등장해요.
첫 번째는 일곱 인, 두
번째는 일곱 나팔, 세 번째는 일곱 표적, 네
번째는 일곱 대적이에요.
이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면 요한계시록은 혼란스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은 단일한 문학 장르로 기록된 책이 아니라, 예언서·서신서·묵시문학이라는 세 가지 장르가 동시에 섞여 있기 때문이에요. 특히 이 가운데 묵시문학은 반드시 해석의 도움과 신학적 안내가 필요한 장르이기도 해요.
묵시문학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하던 당시, 교회는
도미티안 황제의 극심한 박해 아래 있었어요.
이 시기에는
로마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지 않으면 사회에서 배제되고, 고발당하고, 심지어
생명까지 위협받았어요.
그래서 요한은 실명이나 직접적인 표현을 사용할 수 없었고,
사건과 인물을 상징과 비유로 빚대어 표현할 수밖에 없었어요.
이
점에서 요한계시록은 박해 속에서 기록된 전형적인 묵시문학이에요.
한국 교회가 이 묵시문학에 상대적으로 익숙한 이유도 있어요.
우리는
일제강점기라는 역사 속에서 직접 말할 수 없는 시대,
우회적으로 말해야 했던 시대를 경험했기 때문이에요.
숫자 '7'
요한계시록에 반복되는 숫자 7은 결코 무작위가 아니에요.
굉장히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배열되어 있어요.
일곱 인, 일곱 나팔 모두 공통된 구조를 가지고 있어요.
-
처음 네 개가 하나의 묶음이에요
-
그 다음 다섯째와 여섯째가 또 하나의 묶음이에요
그리고 여섯째 뒤에는 반드시 ‘막간’이 등장해요
-
마지막으로 일곱째가 나와요
이 구조는 인이든 나팔이든 동일하게 반복돼요.
이걸 발견하지 못하면
요한계시록은 서로 맞지 않는 이야기처럼 보이기 쉬워요.
요한계시록의 막간
막간은 단순한 휴식 구간이 아니에요.
항상
여섯 번째 인, 여섯 번째 나팔과 깊이 연결되어 있어요.
공통점이 하나 있어요.
여섯 번째 인과 나팔에서는 반드시 질문이 등장해요.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이 막간으로 주어져요.
이 구조를 이해하면 요한계시록이 풀리기 시작해요.
여섯 번째 인
여섯 번째 인은 사도 요한 당시의 박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임할 마지막 진노를 가리켜요.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 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그리고 이 장면은 한 질문으로 끝나요.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이 질문이 요한계시록 7장의 열쇠예요.
누가 이 마지막 진노 앞에 설 수 있는가?
7장은 여섯 번째 인
7장은 막간이에요.
그리고 이 막간은 분명한 질문에 대한 분명한 대답이에요.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이 장면은 굉장히 중요해요.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바람이
아직 불지 않고 있어요.
왜냐하면
네 천사가 붙잡고 있기 때문이에요.
이마에 인치기까지
이유는 분명해요.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받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하더라”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이 다 쳐질 때까지,
그 어떤
재앙도 임하지 않아요.
재앙은 우발적으로 임하지 않아요.
하나님의 보호와 인치심이 먼저예요.
이마에 인친다는 것
많은 사람들이 이 표현을 들으면 곧바로 666을 떠올려요.
그러나
성경은 이미 구약에서부터 이 개념을 충분히 설명해 왔어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이 표는 악을 행하는 자가 아니라,
악을 보고
탄식하며 우는 자에게 주어져요.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은 분명해요.
“이마의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하지 말라”
재앙은 표가 없는 자에게만 임해요.
인은 ‘소속’을 의미
이스라엘의 유목 문화에서는
양과 염소에게 인(표식)을 새기는 것이
익숙한 일이었어요.
그 인은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이 양은 누구의 것인가?”
그래서 하나님의 인이 찍혔다는 말은
내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고백이에요.
문자적인 이마의 표가 아니에요.
소속의 선언이에요.
14만 4천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만약 이것을 문자로 해석한다면
모든 구원받은 사람의 이마에 실제 글자가
있어야 해요.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아요.
이것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가리키는 상징이에요.
누구에게 속했는가
중요한 건 이거예요.
재앙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에요.
내가 누구에게 속했는가예요.
하나님의 인이 있다면,
이 진노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임하지 않아요.
심판이 아니라 ‘징계’
일곱 나팔은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예요.
징계는 끝내기 위함이 아니라
돌이킬 기회를 주기 위함이에요.
출애굽기의 열 가지 재앙이 바로 그 전형이에요.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와서…”
이 모든 장면은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경고예요.
회개치 않음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하나님은 징계를 통해 돌아오기를 기다리세요.
그러나 그들은 끝내 돌아오지
않아요.
더 우상 숭배하고,
더 음란해지고,
더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해요.
교회가 해야 할 일
그 답이 바로 요한계시록 10장이에요.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두루마리를 먹는다는 것은
말씀을 내 것으로 삼는 것이에요.
그러나 목적은 분명해요.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먹는 이유는 다시 가서 전하기 위함이에요.
교회의 존재 이유
복음이 잘 전해질 것 같은 곳만 가는 게 아니에요.
듣지 않을 것 같은
곳이라도 가는 거예요.
왜냐하면 복음은
유일한 생명이기 때문이에요.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세요.
우리는 전하기만 하면 돼요.
우리에게 주시는 부르심
지쳤다면 다시 먹으세요.
상처받았다면 다시 먹으세요.
거절당했다면
다시 먹으세요.
그리고 다시 가서 전하세요.
복음은
오늘도, 여전히,
세상을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