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5. 고난의 유익 (계 6:1)

요한계시록 5. 고난의 유익 (계 6:1)

이 글은 이지웅목사님의 요한계시록
5번째 고난의 유익이란 제목의
말씀을 글로 정리한 것입니다.
영상설교는 맨 하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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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장로

요한계시록 4장은 하늘의 예배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그중에서도 4장 4절에 등장하는 이십사 장로는 요한계시록 전체 해석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들이에요. 이 장로들은 단순한 천사가 아니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 곧 성도를 상징한다고 해석할 수 있어요.

이십사 장로의 특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그들은 흰 옷을 입고 있습니다.
둘째, 그들의 머리에는 관이 씌워져 있습니다.

이 흰 옷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하얀 옷을 의미하지 않아요. 성경은 이 흰 옷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자기들의 옷을 어린 양의 피에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곧, 이 흰 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은 상태, 다시 말해 구원의 상태를 상징하는 표현이에요.

머리에 쓰고 있는 관도 중요해요. 이 관은 왕의 왕관을 뜻하는 디아데마가 아니라, 월계관, 헬라어로 스테파노스입니다. 이 스테파노스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관이에요.

  •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운 사람

  • 믿음을 지킨 사람

  • 달려갈 길을 끝까지 달려간 사람

  • 고난과 시험을 견딘 사람

  •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며 기다린 사람

사도 바울은 이 관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그러므로 이십사 장로는 특정 계층이나 상징적인 존재가 아니라, 구원받은 모든 성도, 바로 우리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어요.



면류관 가지고

요한계시록 4장 10절에는 아주 익숙한 장면이 등장합니다. 찬송가 “면류관 가지고”의 배경이 되는 장면이기도 하지요.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이 장면을 머릿속으로 상상해 보세요.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거예요.

“너 잘했다. 정말 잘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면류관을 씌워주실 거예요. 분명히 상급이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우리의 충성을 기억하십니다.

그런데 놀라운 반응이 나타나요.
성도들은 그 받은 면류관을 다시 벗어 하나님께 드립니다.

이 장면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해요. 그날 우리는 이렇게 고백하게 될 거예요.

“주님, 이제야 알겠습니다.
내가 열심히 믿음을 지킨 줄 알았는데,
보좌 앞에 서 보니 전부 주의 은혜였습니다.
주께서 붙잡아 주시지 않으셨다면,
저는 이 면류관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이렇게 말씀하실 거예요.

“아니야. 네가 잘했어.
너 정말 잘 견뎠어.
너 믿음 지켰고, 너 충성했어.
이건 받을 만해.”

이 장면은 성도의 교만이 아니라, 은혜의 절정이에요.
그리고 이 장면이 요한계시록 4장의 핵심 정서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과 5장 변화

요한계시록 4장은 성부 하나님께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 있는 사도 요한과 교회에게 하나님은 가장 먼저 자기 자신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5장에 들어서면 초점이 바뀌어요.
이제 중심에는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서 계십니다.



오른손에 들린 두루마리

요한계시록 5장 1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이 두루마리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어요.

첫째, 안과 밖에 글이 빼곡히 적혀 있습니다.
둘째, 일곱 인으로 봉해져 있어 열 수 없습니다.

당시 두루마리는 원래 한쪽 면에만 기록했어요. 안과 밖에 모두 글이 적힌 두루마리는 비정상적인 두루마리입니다. 요한은 이 이상한 두루마리를 보고 있지만, 그 안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는 설명하지 않아요.

그런데 이 장면은 구약의 한 선지자가 이미 본 적이 있습니다.



에스겔이 본 동일한 환상

에스겔 2장 9–10절을 보면 동일한 장면이 나와요.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것이에요.
두루마리의 내용은 재앙, 애가, 애곡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두루마리는 열리면 안 되는 두루마리예요.
열리는 순간, 세상에는 고난과 재앙이 시작됩니다.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요한계시록 5장에는 힘 있는 천사가 외칩니다.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그러나 하늘에도, 땅에도, 땅 아래에도 아무도 그 두루마리를 열 수 있는 자가 없습니다. 그때 요한은 크게 웁니다.

그 순간, 장로 중 하나가 말합니다.

“울지 말라.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리고 마침내 등장하시는 분이 계세요.

“그 어린 양이 나아와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

두루마리를 취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일곱 인이 열릴 때

요한계시록 6장은 이 장면에서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인을 하나씩 떼실 때마다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요.

  • 첫째 인:

  • 둘째 인:

  • 셋째 인: 저울 (경제적 궁핍)

  • 넷째 인: 사망

이것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의 연속이에요.
그리고 다섯째 인은 이 모든 것의 결과입니다.



다섯째 인

요한계시록 6장 9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이들은 아무나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했기 때문에
죽임당한 사람들이에요.

이 표현은 요한계시록 1장에서도 반복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 섬에 있었더니”

즉, 이 죽임당한 영혼들은 사도 요한 당시, 도미티안 박해 속의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제단 아래에 있는 영혼들

이 영혼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제단 아래에 있더라”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해요.
구약의 제사 규례를 보면, 제단 아래에 피를 쏟는 제물은 오직 하나님께 드려진 희생 제물뿐입니다.

“그 피 전부를 제단 밑에 쏟을지며”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죽임당한 성도들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제물로 받으셨다는 선언이에요.

사람들은 그들을 쓰레기처럼 버렸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죽음은 내 제단 아래에 있다”


 

스데반의 순교와 바울

이 구조는 스데반의 순교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기도를 들은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바로 사울, 훗날의 사도 바울이었어요.

그리고 사도행전 9장에서, 그 사울을 예수님께서 부르십니다.

바울은 평생 이 사실을 잊지 않았어요. 13개의 바울서신을 보면
이 스데반집사에 관련한 문장이 많이 나오는데요. 
바울이 순교하기 바로 전 썼던 디모데후서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도다”

그 면류관의 '관' 이라는 헬라어는 스테파노스
스데반을 말해요. 



우리에게 있는 스데반

바울에게만 스데반이 있었던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있었습니다.

이름 없이 기도하던 부모님,
눈물로 중보하던 교사와 목회자,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성도들의 헌신.

그 기도가 오늘의 우리를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스데반이 될 차례

이제 차례는 우리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힘들게 하는 사람들,
포기하고 싶은 영혼들,
그 이름을 붙잡고 기도하세요.

그 기도가
누군가를 바울로 만들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복음화는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 사실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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