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24. 눈뜬 맹인 (요한복음 9:1-7)

요한복음 강해 24. 눈뜬 맹인

이 글은 송태근 목사님의 요한복음 강해
24번째, 눈뜬 맹인이라는 제목으로 
전하신 말씀을 글로 정리한 것입니다.
영상설교는 맨 하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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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보시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요한복음 9:1)

요한복음 9장은 한 사람의 인생을 통해 하나님의 질서와 원리를 드러내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십니다. 이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먼저 그를 보셨다는 사실이에요.

맹인에는 여러 유형이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보지 못한 경우, 사고나 질병으로 시력을 잃은 경우, 그리고 점차 시력을 잃어가는 약시 상태까지 다양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대상은 ‘날 때부터 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색깔이나 사물에 대한 기억 자체가 없기 때문이에요.

이 장면은 단순한 치유 이야기가 아니라, 전혀 경험이 없는 인생 속으로 하나님이 어떻게 개입하시는지를 보여주는 시작점입니다.



제자들의 질문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요한복음 9:2)

제자들은 아주 자연스러운 질문을 던집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고통이나 장애를 ‘죄의 결과’로 보는 인식이 일반적이었어요. 개인의 죄이든, 부모의 죄이든 반드시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이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당시 사회의 신념 체계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제자들 역시 그 틀 안에서 사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원인을 뒤집는 시선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요한복음 9:3)

예수님의 대답은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이 고통은 특정한 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드러내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이것이 ‘죄가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인간은 누구나 근원적인 죄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사건을 ‘윤리적 잘못의 결과’로 연결시키는 것을 부정하신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을 일반화해서 모든 고통이나 장애를 동일하게 해석해서도 안 됩니다. 이것은 특정한 상황 속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진흙으로 눈에 바르시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요한복음 9:6)

예수님은 이 장면에서 특별한 방식을 사용하십니다. 침과 흙을 섞어 눈에 바르시는 행동은 단순한 치료 행위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흙’을 사용하신 대표적인 장면은 창세기의 인간 창조입니다. 흙으로 사람을 빚고 생기를 불어넣으셨죠. 이 사건은 그 창조를 떠올리게 합니다.

따라서 이 장면은 ‘치유’가 아니라 ‘재창조’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눈을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로 다시 빚으시는 선언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실로암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요한복음 9:7)

눈을 뜨게 된 결정적인 순간은 실로암 못에서 씻었을 때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미 예수님은 그의 인생에 개입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께 요청하지도 않았고, 믿음을 고백하지도 않았습니다. 모든 시작은 예수님의 일방적인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보냄’이라는 과정을 통해 완성됩니다.

실로암이라는 이름 자체가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즉, 그는 단순히 치유된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다시 파송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믿음

처음 이 사람은 예수님을 단순히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요한복음 9:11)

이후 사람들의 질문 속에서 그는 점점 인식을 바꿉니다.

“선지자니이다” (요한복음 9:17)

그리고 더 나아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요한복음 9:33)

결국 예수님을 다시 만난 후에는 완전한 믿음에 이르게 됩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요한복음 9:38)

이 흐름은 신앙이 한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과 사건을 통해 점진적으로 깊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파문과 진짜 공동체의 정체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요한복음 9:34)

그는 진리를 말한 대가로 종교 공동체에서 쫓겨납니다. 이는 단순한 출교가 아니라, 생존 기반을 완전히 잃는 사건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순간이 진짜 공동체와의 만남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이 다시 그를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형식만 남은 종교는 생명을 살리지 못합니다. 오히려 생명을 억압하고 배제합니다. 반면 예수님은 버려진 자를 다시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실로암 공동체

이 이야기는 단순히 한 사람의 기적 사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교회는 어떤 곳이어야 할까요? 머물러 있는 장소가 아니라 ‘보내는 곳’, 즉 실로암이 되어야 합니다. 씻음과 회복이 일어나고,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게 하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우리의 삶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준비가 완벽해서 보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약함도, 부족함도, 심지어 고난도 모두 보내심의 도구가 됩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도 “나의 매임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고 고백한 것처럼, 우리의 상황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제한하지 않습니다.



보냄을 받기 위해

삶은 복잡해 보이지만 본질은 단순합니다. 우리는 왜 살아가는가에 대한 질문에 이 본문은 분명하게 답합니다.

우리는 ‘보냄을 받기 위해’ 살아갑니다.

성공이든 실패든, 강함이든 약함이든 모든 것은 그 목적을 위해 사용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상태를 통해 일하십니다.

오늘 하루의 삶이 작은 실로암이 되어, 다시 세상으로 흘러가는 삶이 되기를 조용히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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