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20. 하나님의 공의란?

성전에서 시작된 가르침
7장은 명절의 한가운데에서 예수님께서 성전에 올라가시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이 장면은 기적이 아니라 ‘가르침’으로 시작된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요한복음 7:14)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합니다.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요한복음 7:15)
그들이 놀란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당시 관례처럼 랍비의 권위를 인용하지 않고,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방식으로 직접 말씀하셨다는 점입니다. 또 하나는 정식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분이 놀라운 표현력과 논리, 수사로 가르치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 집중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메시지를 가로막는 편견
사람들은 메시지보다 외적인 요소에 쉽게 영향을 받습니다. 말하는 사람의 학력, 배경, 이력, 권위 등을 먼저 보고 판단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결국 진리를 듣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미 마음속에 선입견이 자리 잡으면, 말씀을 받아들이기보다 흠을 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중요한 과제는 표현과 형식에서 벗어나 메시지 자체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참된 설교란 무엇인가
좋은 설교는 단순히 말이 뛰어난 설교가 아닙니다. 핵심은 분명합니다.
청중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보게 하는 것
예수님은 자신의 가르침의 출처를 분명히 밝히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요한복음 7:16)
설교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인간이 노력하여 만든 설교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전하는 말씀입니다.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말씀인지 분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진리를 분별할 수 있는 기준
예수님은 진리를 분별하는 기준을 제시하십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요한복음 7:17)
진리는 단순히 머리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려는 마음 속에서 분별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기 영광을 구하는 자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를 구분하십니다.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낸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7:18)
율법을 안다고 하지만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요한복음 7:19)
율법을 철저히 지킨다고 자부하던 그들에게 “아무도 지키지 않는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율법의 글자는 붙들고 있지만, 그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안식일과 할례
이제 예수님은 매우 구체적인 예를 통해 그들의 모순을 드러내십니다. 바로 안식일과 할례의 문제입니다.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으니 …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 (요한복음 7:22)
할례는 에서 하나님께서 에게 주신 언약의 표징입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창세기 17:10)
또한 율법은 할례의 시기를 분명하게 정합니다.
“여덟째 날에는 그 아이의 포피를 벨 것이요” (레위기 12:3)
문제는 이 여덟째 날이 안식일과 겹칠 때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과, 8일째 할례를 행하라는 명령이 충돌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해결 지침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놓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판단하도록 남겨두신 영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해석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대 율법 교사들은 결정을 내립니다.
할례는 생명과 관련된 중요한 언약이기 때문에,
안식일보다 우선한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 안식일이라도 할례는 시행해야 한다
이 기준은 하나님이 직접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해석을 통해 만들어진 판단 기준입니다.
248개의 신체 기관과 할례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의 몸이 248개의 기관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이 전체가 건강하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할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었습니다.
이 사상은 후대에 랍비 에 의해 더욱 체계화되었지만, 이미 당시에도 널리 퍼져 있던 개념이었습니다.
즉, 할례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전신의 건강과 생명을 위한 행위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그 작은 행위를 통해 전체 몸의 건강을 유지한다는 논리로 할례를 시행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반문
이제 예수님의 말씀이 분명해집니다.
“모세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요한복음 7:23)
그들은 한 부분의 행위를 통해 전체 건강을 지키겠다고 하면서 안식일에도 할례를 행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38년 동안 고통받던 사람을 완전히 회복시키셨습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신 전체를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것을 문제 삼으며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드러난 모순과 영적인 무지
이 장면은 유대인들의 깊은 모순을 드러냅니다.
부분을 위한 행위는 허용하면서,
전체를 살리는 일은 정죄하는 모습입니다.
이는 그들이 율법을 지킨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율법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이 영적인 무지는 예수님을 죽이려는 자리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외모가 아닌 공의로 판단하라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기준을 제시하십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요한복음 7:24)
세상의 공의는 판단하고 정죄하는 데에 머무르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생명을 살리는 공의입니다.
그 절정은 십자가에서 나타났습니다. 심판이 이루어진 자리에서 동시에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공의는 단순한 정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웃에게 마땅히 줄 것을 주는 것, 곧 생명을 살리는 태도입니다.
누군가를 정죄하고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어 다른 이를 살리는 방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국 신앙의 중요한 기준은 이것입니다.
이 일이 생명을 살리는가, 아니면 죽이는가
이 기준이 교회와 성도가 끝까지 붙들어야 할 본질적인 가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