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10. 예수님과 성전 (요한복음 2:12-22)

요한복음 강해 10. 예수님과 성전 (요한복음 2:12-22)

이 글은 송태근목사님의 요한복음 강해
10번째, 예수님과 성전이라는 말씀을
글로 정리한 것입니다.
영상설교는 맨 하단에 있습니다.

요한복음 모두보기



그 후에

“그 후에…”

요한복음 2장은 “그 후에”라는 표현으로 시작됩니다. 이 말은 앞에 기록된 사건을 받는 연결어입니다. 바로 가나 혼인잔치 사건입니다.

가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한 일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표적이었습니다. 표적은 하나의 사인(sign)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어떤 실체를 가리킵니다.

첫 번째 표적은 무엇을 보여주었습니까?

행복해야 할 혼인잔치가 포도주가 떨어짐으로 중단되었습니다. 기쁨이 멈추고, 수치와 슬픔이 찾아온 자리였습니다. 그 자리에 예수님이 초대받아 오셨고, 물을 포도주로 바꾸심으로 중단된 기쁨을 회복하셨습니다.

첫 번째 표적은 선언이었습니다.

참된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이 땅에 오셨는가.

그렇다면 두 번째 표적인 성전 사건은 무엇을 설명합니까?

그분이 어떤 방식으로 인류의 중단된 행복을 회복하실 것인가.

요한은 이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시간적 배열이 아니라 의미적 배열로 이 사건을 사역 초기에 배치한 것입니다.



유대인의 유월절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요한은 굳이 “유대인의”라는 수식어를 붙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유대인들”이라는 표현은 대체로 긍정적 뉘앙스가 아닙니다. 이는 이후에 펼쳐질 사건이 유대 종교 지도층의 문제를 드러낼 것임을 암시합니다.

유월절은 절기의 절정이었습니다. 평소 10만~15만 명이 거주하던 예루살렘에 약 50만 명 가까운 인파가 몰려드는 대절기였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올라갔다’는 표현은 단순한 지리적 표현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은 신앙의 중심지였기 때문입니다.



성전 안에서 발견된 두 집단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여기서 예수님은 두 집단을 보십니다.

  1. 제물용 짐승을 파는 장사꾼들
  2. 환전상들

제물 판매 자체가 잘못이었습니까? 아닙니다. 해외 각지에서 온 순례자들은 장거리 이동 중 제물이 상할 수 있었기 때문에 현지에서 구입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 시장이 성전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성전 입구의 검시관들이 제물에 꼬투리를 잡아 불합격 처리하고, 결국 성전 안에서 다시 제물을 구입하게 만드는 구조였습니다. 그 이익은 종교 기득권층에게 돌아갔습니다.

당시 성전에는 약 2만 명의 제사장과 레위인이 상주하고 있었습니다. 거대한 종교 경제 시스템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환전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 화폐에는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져 있었고 “가이사는 주님”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성전 헌금에는 이를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성전 전용 화폐인 세겔로 환전해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수료와 차익이 발생했습니다.

성전 안은 이미 이익 메커니즘의 중심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채찍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갑작스러운 분노가 아니라,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만드신 채찍이라는 단어가 다음 본문과 연결된다는 점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막 15:15)

같은 단어입니다.

성전은 제사의 장소입니다. 제사의 핵심은 제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물로 쓰일 짐승들을 채찍으로 내쫓으십니다.

이것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제물 없는 제사.

껍데기만 남은 종교. 속 빈 강정과 같은 신앙.

그러나 동시에 이 장면은 또 하나를 암시합니다.

참된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채찍을 맞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두 번째 표적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십자가로 회복하러 왔다.



내 아버지의 집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장사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예배의 공간에서,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할 자리에서 이윤 추구가 중심이 되는 것은 본질을 무너뜨립니다.

이 사건은 2000년 전 이야기로 끝납니까?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심령 안에서도 반복됩니다.

기도하면서도 거래합니다.
신앙이라는 명목으로 계산합니다.
예배 속에서도 이익을 따집니다.

참된 성전이신 그리스도 안에 머문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장사를 반복합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여기 “성경”은 단수입니다. 특정 구절을 가리킵니다.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시 69:9)

제자들은 이 장면을 보고 이 시편 말씀을 기억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을 너무 사랑하셨습니다. 그 열심이 자신을 삼켰습니다.

삼켰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자신이 죽을 것을 아셨습니다.
유대인들의 공분을 살 것을 아셨습니다.
십자가로 가는 길임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 죽음의 두려움을 덮어버렸습니다.

사랑이 두려움을 삼킨 것입니다.



이 성전을 헐라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유대인들은 표적이 아니라 이적을 요구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해학적이고 심오합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여기 “헐라”는 사실상 “죽여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일으키리라”는 건축용어가 아니라 부활용어입니다.

ἐγείρω(에게이로) — 부활하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이제 건물 성전은 중심이 아닙니다.
참된 성전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포기하지 않으신 주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제자들은 언제나 한 박자 늦었습니다.
말씀하실 때는 몰랐습니다.
이루어지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기다리셨습니다.
끝까지 묶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지어져 가는 새로운 성전이 되었습니다.



세 가지 질문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첫째,
내 안의 성전에서 나는 여전히 장사하고 있지 않은가?

둘째,
하나님의 원리를 붙들면 손해 볼 것을 알면서도,
그 두려움을 사랑으로 삼킬 결단이 있는가?

셋째,
더디 깨닫는 나를 끝까지 기다리시는 그 사랑 앞에
나는 순종으로 응답하고 있는가?


성전은 더 이상 건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성전입니다.

이 한 주간, 참된 신랑을 바라보는 예배자로,
장사를 멈추고 사랑으로 두려움을 삼키는 순종의 자리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댓글 쓰기

다음 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