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22. 정죄와 용서를 넘어서
설교말씀을 글로 정리한 것입니다.

말씀 앞에서
오늘 본문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이라도 한 번쯤 들어봤을 만큼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바로 죄 많은 여인이 붙잡혀 오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잘 알려진 이야기일수록 오히려 많은 오해와 곡해가 덧씌워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간,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가 아니라, “이 말씀이 지금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에 집중해야 합니다. 누군가를 판단하는 자리에 서기보다, 내가 말씀 앞에 서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감람산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니라” (요한복음 8:1)
예수님께 감람산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쉼과 기도의 자리였습니다.
하루 종일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가르치시며 바쁜 일정을 보내신 후, 예수님은 늘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육신의 피로를 쉬셨고,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와 깊이 교제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은 종종 스케줄에 끌려다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삶은 단순했습니다. 분주함 속에서도 반드시 하나님과의 시간을 확보하셨습니다.
여인을 끌고오다
날이 밝자 예수님은 다시 성전으로 내려오셔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예상치 못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요한복음 8:3)
이 여인은 단순한 혐의자가 아니라, 현장에서 붙잡힌 명백한 죄인이었습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간음은 혼자 할 수 없는 죄입니다. 분명 남자가 있었을 텐데, 성경에는 여인만 등장합니다. 율법적으로도 이는 불완전한 상황입니다.
율법의 기준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나거든 그 동침한 남자와 여자를 둘 다 죽여” (신명기 22:22)
율법은 분명히 남자와 여자를 함께 처벌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약한 여인만 끌려왔습니다.
이 장면은 이미 공정한 재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여인의 죄를 다루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다른 의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요한복음 8:4-5)
표면적으로는 율법 해석을 묻는 질문이지만, 실제 목적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요한복음 8:6)
이들의 관심은 여인의 회복이나 정의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용서하자”고 하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고, “돌로 치라”고 하면 로마법을 어기는 상황이었습니다. 완벽한 함정이었습니다.
땅에 쓰신 글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요한복음 8:6)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요한복음 8:8)
예수님은 두 번이나 땅에 글을 쓰셨습니다. 성경은 그 내용이 무엇인지 명확히 말하지 않지만, 중요한 힌트가 있습니다.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 (출애굽기 31:18)
'친히 쓰신것'의 원문은 '손가락으로' 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손가락으로” 쓰신 사건은 십계명입니다.
그리고 십계명은 두 번 주어졌습니다.
이 흐름 속에서 많은 학자들은 예수님이 십계명을 상기시키는 행동을 하셨다고 봅니다. 율법의 본질을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요한복음 8:7)
이 말씀은 단순히 “용서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대로 하자”는 선언입니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심판자는 반드시 죄 없는 자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순간, 상황은 완전히 뒤집힙니다. 돌을 들고 있던 사람들이 오히려 심판대에 서게 된 것입니다.
떠나가는 사람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요한복음 8:9)
사람들은 하나씩 떠나기 시작합니다. 이는 회개의 결과라기보다, 자신들의 죄가 드러난 데 대한 부끄러움의 반응입니다.
결국 아무도 남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여인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요한복음 8:10)
이제 남은 사람은 단 두 명입니다. 죄인인 여인과, 죄 없으신 예수님입니다.
유일하게 이 여인을 정죄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요한복음 8:11)
예수님은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죄를 가볍게 여기지도 않으셨습니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하셨습니다.
우리가 서 있어야 할 자리
이 본문을 읽을 때 우리는 종종 제3자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나는 돌을 던질까, 말까?”를 고민합니다.
그러나 이 본문의 초점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돌을 들고 있던 사람도 아니고, 판결을 내려야 할 사람도 아닙니다. 바로 그 자리에 서 있는 여인입니다.
정죄받아 마땅한 존재였지만, 예수님의 은혜로 살아난 존재입니다.
십자가를 향한 사랑
세례 요한의 고백이 이 장면을 정확히 설명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한복음 1:29)
예수님은 이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신 이유는, 그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로 가시기 때문입니다.
심판을 면제해주신 것이 아니라, 그 심판을 자신이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는 교훈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더 깊은 자리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입니다.
나는 돌을 들고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은혜로 살아난 여인인가.
이 시간, 그 자리를 분명히 깨닫고, 정죄 대신 은혜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