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16. 생명의 부활 (요한복음 5:24-29)

요한복음 강해 16. 생명의 부활

이 글은 송태근 목사님의 요한복음 강해
16번째, 생명의 부활이란 제목으로 전하신
말씀을 글로 정리한 것입니다.
영상설교는 맨 하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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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에게 보이시는 더 큰 일

본문은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설명하시는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이 하나 나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요 5:20)

여기서 말하는 “더 큰 일”이 무엇인지 본문은 점점 더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그것은 단순히 병자를 고치시는 정도의 일이 아니라, 죽음의 세계에 있는 자를 생명으로 옮기시는 일, 곧 부활과 영생의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어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24)

여기서 “옮겼느니라”는 표현은 완료형입니다. 앞으로 언젠가 옮겨질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이미 끝난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자에게 영생은 막연한 미래의 보장이 아니라, 이미 시작된 현실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어떤 의미의 사건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곧 이어 부활의 두 갈래를 말씀하십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 5:29)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두 가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첫째, 부활은 믿는 사람만 경험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악한 일을 행한 자도 부활한다고 말합니다. 다만 그 부활의 성격이 다릅니다.
악한 자의 부활은 심판을 받기 위한 부활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백성이 경험하는 부활은 생명의 부활입니다.
둘째, 그렇다면 “선한 일을 행한 자”란 누구인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과연 누가 자신 있게 나는 선한 일을 행한 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배워온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 구원입니다. 그래서 이 대목은 더 신중하게 보아야 합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란

우리는 분명히 이렇게 배웠습니다.
구원은 행위에서 나지 않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5장 29절은 왜 선한 일을 행한 자가 생명의 부활로 나온다고 말할까요.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5장에서 하신 말씀을 함께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마 25:31)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마 25:32)

예수님은 마지막 날의 구분을 양과 염소의 비유로 설명하십니다.
당시 목자들은 낮에는 양과 염소를 함께 풀어놓지만, 밤이 되면 따로 구분해 우리에 들였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양과 염소는 생리적 특성이 달라서 같이 재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양과 염소의 구분은 낮 동안 무엇을 더 열심히 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본성이 다른 존재를 가려내는 일에 가깝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힌트가 됩니다.

예수님은 우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마 25:34)

여기서도 “예비된 나라”는 이미 준비되고 확정된 나라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설명은 뜻밖입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마 25:35)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마 25:36)

그러자 의인들은 오히려 놀라며 묻습니다.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마 25:37)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마 25:38)

이 반응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가 한 일을 의식적으로 계산하고 기억하며 자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살았다는 뜻입니다.
곧, 그것이 이들의 계산된 종교 행위가 아니라 새로워진 본성에서 흘러나온 삶의 경향이었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것이 요한복음 5장 29절의 “선한 일을 행한 자”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선한 일을 해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아니라,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
이미 그리스도의 생명이 안에 들어온 사람이라면, 그 생명은 반드시 어떤 방향성과 성향을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선한 일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은 생명의 결과입니다.



부활의 생명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관심은 억지로 열매를 만들어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내가 정말 그리스도께 붙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붙어 있기만 하면, 그분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열매는 저절로 나타나게 됩니다.
본성처럼, 경향처럼, 설명하지 못해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 됩니다.

이것은 바울이 말한 구원의 핵심과도 연결됩니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빌 3:9)

우리 안에 있는 의는 우리의 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의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기 힘으로 의를 생산해내는 삶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의가 삶 속에서 드러나는 삶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10)

여기서 바울은 “부활의 권능”을 말합니다.
이 표현은 단지 마지막 날 우리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의미에 머물지 않습니다.
이 권능은 지금 이 땅에서, 죽음의 냄새가 가득한 세상 한가운데서, 생명을 가진 자로 살아내게 하는 능력입니다.

로마 시대 사람들에게 권세와 힘이 선의 기준이었습니다.
황제의 보좌는 통치와 심판과 영광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진짜 권능은 로마 황제의 보좌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에 있다고.
계시록의 요한도 밧모섬에서 하늘 보좌를 보았고, 이사야도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무너지는 땅의 권력이 아니라 여전히 다스리고 계신 하늘 보좌를 보았습니다.
이것은 모두 같은 메시지입니다.
세상이 보이는 힘을 자랑하고 절망을 말할 때에도, 진짜 최종 권세는 하나님의 보좌에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미래의 약속, 오늘의 삶

그러므로 부활은 단지 마지막 날 우리의 육체가 다시 살아나는 교리에 그치지 않습니다.
부활은 이미 오늘 시작된 생명의 현실이며, 지금 이 땅에서 살아내야 하는 소명입니다.
죽음의 냄새가 가득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죽은 자처럼 누워 있어서는 안 됩니다.
부활의 권능이란 바로 거기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누워 있던 자가 일어나듯, 절망의 구조 속에서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망의 논리, 세상의 시스템, 죄의 흐름에 그대로 눌려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한가운데서 생명의 사람으로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삶은 매우 구체적입니다.
우리의 언어가 닿는 곳마다, 우리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우리의 시간과 땀이 스며드는 자리마다 생명의 향기가 흘러가야 합니다.
죽음의 냄새가 걷히고, 사단의 그림자가 밀려나고, 일어날 수 없는 사람을 일으키는 방향으로 살아야 합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이들을 향해 손을 내미는 것이 특별한 영웅주의가 아니라, 생명을 가진 자에게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경향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선한 일을 행한 자”의 의미입니다.
그것은 조건을 충족하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부활 생명을 받은 사람이 살아내는 본성적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억지 열매를 강요하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열매를 맺으라고 몰아붙이기보다, 우리가 정말 포도나무이신 예수께 붙어 있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거기에 연결되어 있기만 하면, 생명의 수액이 흘러오기만 하면, 열매는 절로 맺힙니다.

결국 오늘 설교가 말하는 부활은 이것입니다.
부활은 미래의 어떤 먼 사건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자들이 살아내는 현재의 권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이미 이루어 놓으신 생명의 권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은 죽음을 닮아가서는 안 됩니다. 생명을 퍼뜨려야 합니다.
한 줄기 강처럼 흘러가야 합니다. 황무지가 꽃피고, 마른 땅에 열매가 맺히고, 죽은 곳이 살아나는 기적이 우리의 삶을 통해 나타나야 합니다.

이 모든 일의 시작도, 근거도, 능력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그분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셨고, 그분이 우리 안에 부활의 생명을 심으셨으며, 그분이 오늘도 우리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부활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오늘 부활의 권세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시대 한복판에서 생명의 냄새로 사망을 덮어버리는 사람들,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세에 붙들린 사람들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 성도들이 되어 삶의 자리마다 생명을 흘려보내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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